지난 날 육지와 제주도를 오가는 배들은 계절풍의 영향으로, 평탄하지 않은 해저면으로 인해 바람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고 예기치 못한 풍랑이 배를 요동치게 한다. 제주사람들은 육지로 오가다가 또는 관리들의 부임‧귀임과 공물운송에 차출되어 항해하다가 자칫 표류하는 일이 많았다. 일단 표류하게 되면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족들이 상실감 속에 사는 일은 제주사람들의 일상사가 되었다.
육지에서 제주도로 오가자면 조류와 바람을 이용하곤 하지만 바람과 풍랑이라는 것이 예측불허인지라 풍랑에 휩쓸린 배가 뒤집혀 사람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바람에 떠밀려 정처도 없이 흘러가다가 망망대해 위에서 죽거나 굶어죽기도 하고, 멀리 낯선 땅에 표착하기도 했다. 그들이 만일 살아남아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눌러앉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이 요행히 살아서 돌아온다 해도 몇 달 몇 년이 걸린다. 그들은 예기치 못한 조난으로 바다를 떠돌다가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는데 위험에 직면하여 생사의 기로에 섰다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돌아온 이들의 이야기는 모험담이자 오랜 기간 동안 낯선 곳에서 경험한 이국의 풍물‧문화에 대한 견문담이 되었다.
1797년 정조임금을 흥분시키고 조선사회를 깜짝 놀라게 한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나타난 이방익(1756-1801)의 표류사건이다. 제주 북촌사람 이방익은 임금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충장위장忠壯衛將(정3품)의 직책에 있던 사람인데 그 전 해인 1796년9월에 잠깐 말미를 얻어 제주에 머무르던 중 제주연해(우도 뱃길)에서 일행 7명과 더불어 일진광풍에 휩쓸려 가뭇없이 사라진 뒤 중국의 복건‧절강‧양자강‧산동‧북경‧만주를 거쳐 9개월 반 만에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이방익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목적지도 없이 정처도 없이 표류하는 정황과 팽호도(대만해협)에 표착하였다가 중국 대륙을 거쳐 고국에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에서 본 중국의 제도‧문물‧풍속‧고적에 얽힌 역사와 설화, 지나온 연로의 풍광 등에 대하여 가사歌詞인 「표해가」를 지었고 순한글 서사문 『표해록』을 썼다.
이방익은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인 제주 북촌리를 찾았다. 그가 고향사람 7명과 더불어 우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느닷없이 일진광풍에 풍랑이 거칠어지자 그들이 탄 일엽편주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배안에 있는 음식은 순식간에 바다에 휩쓸려버렸고 노와 돛대와 삿대가 부러져 날아가 버렸다. 배는 늦가을에 불어오는 북서풍에 밀려 부침을 거듭하며 해안에서 멀리 한없이 떠내려갔다. 배는 망망대해에 떠도는 가랑잎같이 바람에 따라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넓은 바다로 흘러간다. 인간의 힘으로는 방향을 돌릴 수도 없고 속도를 조절할 수도 없고 정지시킬 수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물에 빠져 죽기보다 기갈과 굶주림으로 죽을 처지에 놓여 있었다.
기갈상태에서 5,6일을 버텨야 했는데 느닷없이 하늘이 한 줄기 비를 쏟아 부어 겨우 기갈을 면할 수 있었다. 배는 남쪽으로 한없이 흘러가는데 열흘이 지나도록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큰 물고기가 선판으로 뛰어오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경각에 죽을 목숨이 살아나는 기적을 맞았던 것이다. 배는 바람을 따라 장장 6,000리를 흘러가 표류한 지 16일 만에 여덟 사람을 대만해협 상에 위치한 팽호군도의 북섬 북쪽해변에 내동댕이쳤다.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음식을 주는 등 따뜻하게 대했다. 이방익은 팽호도 그리고 이송된 대만의 여러 대관들 앞에서 자신이 조선국의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는 장군임을 당당하게 밝힌다. 이로 인해 이방익은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 여러 관청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방익 등은 대만해협을 건너 중국본토 최남단 하문에 상륙했다. 이방익은 우선 주자서원에 들러 주자의 소상塑像에 참배했는데 이는 중국의 관리들과 선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일행이 하문에서 출발하여 천주‧복주‧남평에 이르는 동안 연도에는 그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방익은 곳곳에서 번화한 거리, 넘쳐나는 물류, 여인들의 호화로운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모습 등 중국의 발전된 모습을 체험하고 풍속‧풍물을 눈여겨보았다.
이방익은 가파른 선하령을 넘어 절강성으로 향했고 항주와 강소성으로 이동했다. 그는 양자강을 거슬러 동정호를 찾았다. 그 동안에 그는 명승고적과 유명사찰 그리고 유명한 전적지를 방문했다. 이방익 일행은 산동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고 청나라 황제의 재가를 얻어 귀국길에 올랐다. 실로 9개월 보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1797년(정조21)윤6월10일 압록강을 건넌 이방익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정조는 직접 이방익이 견문한 내용을 청취했다. 미지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는 이방익이 아뢰는 표류담에 충격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신하들 앞에서 앞으로 이방익을 크게 쓰겠다고 공언하기도 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관심은 조정의 뭇 신하들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방익은 고려중기 이후 조선시대를 통틀어 양자강 이남과 대만을 처음 목격한 사람인데 이는 대단한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중국 강남을 이상향으로 삼아 시와 그림을 남겼지만 그것들은 실제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글과 그림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18세기의 대항해시대 이래 급격하게 변모하는 중국 강남의 모습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이방익의 경험담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이방익이 엮어가는 이야기는 매우 귀하고 생소한 것이었다. 이방익이 본 관청‧군부대‧고적과 유물‧사찰 등은 중국의 역사이며 동시에 당대였다. 그가 엿본 풍물과 풍속은 중국의 살아있는 문화였다. 그의 표류담은 중국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국제적 상황, 중국사회의 변화, 백성들의 생활상 및 평등사회를 지향한 포용적 정치현실까지 폭넓게 담고 있었다.
이방익의 표류담은 정조의 주도하에 신진개혁을 시도하던 조정대신들과 개혁세력에게도 일파만파 전달되어 그들로 하여금 조선의 현실을 반성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하층민들에게까지 큰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던 개혁의 바람은 3년 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이방익은 1801년 44세로 고향 제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이방익의 표류담은 타다 남은 재가 된 듯했지만 질화로 속에 이글거리는 불씨로 남아 풀뿌리 백성들에게 읽혔다. 이토록 1797년의 표류 이야기가 백년이 넘도록 입에서 입으로, 또 기방에서까지 불리었다는 것은 이방익의 장거가 우리 민족의 자존심으로 이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권무일‧심규호‧노인숙‧유소영‧한라일보취재단)는 2018년부터 여러 번에 걸쳐 그의 길을 따라서, 팽호도와 대만, 중국의 복건성을 찾았고 또 선하령을 넘어 전당강을 따라 항주로, 그리고 강소성을 지나 양자강을 건넜고,(복건성‧절강성‧강소성 탐방에는 중국정부의 협찬을 받았다.) 북경과 산해관에서 이방익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우리의 대장정은 매우 유의미한 것이었다.
이방익의 행적이 관찬문서인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및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어 있고 전국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그의 『표해가』가 수준 높은 작품성으로 국문학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2017년 평설『이방익표류기』(권무일 저)가 발간되기까지는 이방익이라는 이름이 제주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알게 된 사람도 이방익의 표류와 행적이 제주도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제주도가 낳은 한 개인이 한반도를 아우르는 명성을 얻고 나아가서 세계인으로 발돋음하는 일은 제주의 자존심이며 제주도사람들이 자식을 키우는 보람임에 틀림이 없다.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되고 제주도가 한 걸음 열린사회로 나아가는 이즈음 제주도는 표류인 이방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방익 작품의 연구, 혹 남아있을 유물‧유적의 발굴, 그의 표류체험을 통한 해양문화의 탐구, 표착지 팽호도의 방문, 중국내 이방익의 경로 탐색, 중국 남방지역(특히 복건성‧절강성)과의 학문적 교차연구 및 문화교류 추진, 이방익의 송환경로를 따라가는 관광루트의 개발 등이 요구된다.
<별첨> 이방익의 표류 및 송환경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