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지정학적 가치에 대하여
권 무 일
임진왜란이 지난 지 5년이 넘도록 왜병들은 철수하지 않고 경상도에 머물면서 갖은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권율 도원수가 추풍령에 진을 치고 으름장을 놓아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응서가 속오군(비정규군)을 모아 기습공격을 해도,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그들의 진지를 쓸어버려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200명도 안 되는 관군을 거느린 권율이 2,000명의 군사를 준다면 왜군들을 싹 쓸어버리겠다고 해도 조정에서는 그가 말머리를 돌려올지도 모른다며 응원하지 않으니 조선과 왜군의 대치는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왜국에 통신사로 간 황신이 다음과 같은 첩보를 전해 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말하기를 탐라에 좋은 말이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는데 이제야 말로 우선 전라도를 치고 다음에 탐라를 취할 때다.”
조정에서는 황신의 첩보를 믿을 수 없다며 깔아뭉갰지만 혹시나 하여 군사 100명을 제주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정유년 6월 김응서 장군으로부터 그리고 권율 장군으로부터 선조에게 급보가 올라왔다. 왜군 16만 명이 전라도를 향하여 밀려들어오기 50여 일 전이다.
“관백(도요토미)이 제장을 모아놓고 지시하기를 너희는 8월1일에 곧바로 전라도 등지로 들어가 곡식을 베어 군량을 삼고 산성을 격파할 것이며 전라도와 충청도에 유둔하면서 이어 제주도를 치라.”
장계를 접한 선조는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도요토미의 욕심을 알 만하다. 제주는 지형상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정세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우리가 제주를 지키지 못하여 적의 소굴이 된다면 장차 우리의 힘으로는 되찾기란 어려울 것이고 우리나라는 정녕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제주를 빼앗기게 된다면 우리나라가 망하게 되는 때이니 이 점 매우 걱정스럽다.”
영의정 유성룡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전라도로 쳐들어오는 적은 우리 군민이 총궐기하여 막으면 비록 지루한 싸움일지라도 서울까지 치고 올라오지는 못할 것이다. 더욱이 이순신이 해상을 장악하고 있으니 안심이 된다. 그러나 제주는 다르다. 우리에게는 제주로 보낼 군사도 배도 없다. 제주는 섬이라 사방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적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해안을 내주고 산악전을 벌일 수도 없다. 산악지대에는 물이 없고 농작물도 자라지 못한다. 원병이나 무기를 보낼 처지도 못 된다.”
제주로서는 일촉즉발의 위기다. 조선이 육지의 왜적을 몰아낸다 해도 제주가 무너지면 제주는 왜놈들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제주에는 병력상황도 열악하고 절해고도라 중앙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제주의 장정들은 나라를 구하자며 삼삼오오 육지로 떠났고 무기는 녹슬고 성벽도 무너져 내린 채 방치되고 있었다. 이경록 목사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경록은 임진년 8월에 부임했는데 그는 나주 목사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천일과 더불어 최초로 의병을 모집해 수원으로 달려가던 중 제주 목사로 발령받았다.
이경록은 우선 제주성과 명월진성을 수리하고 우도‧비양도‧죽도(차귀도)에 진지를 쌓고 환해장성을 수리하는 한편 한라산 산록에 산성을 쌓았다. 한라산 중턱에 보이는 높이 다섯 자가 넘고 두 겹으로 쌓여진 산성은, 높이 석 자의 상잣성과는 다른데 이는 필시 당시 왜적과 끝까지 싸우기 위하여 쌓은 제주사람들의 항전의 의지와 피나는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남녀노소 특히 여인들도 자진해서 병역에 참여했다. 제주사람들의 고생은 참혹했다. 원래 자체 생산된 농산물만 가지고는 자급자족할 수 없는 처지라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군사훈련과 노역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에게는 오직 일념 나라를 지키겠다는 각오만이 있었다. 이경록 목사는 제주 방어를 위하여 불철주야 제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온힘을 쏟던 중 이듬해 과로로 쓰러져 제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무려 7년간의 사투였다. 이듬해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왜적이 퇴각하기 시작했고 제주 공략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도요토미의 죽음은 제주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지리적으로 보면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부속도서로서 한반도 남쪽바다에 위치한 1,800㎢의 작은 섬으로 완도가 90km, 부산이 300km, 일본 후쿠오카가 350km, 중국 상해가 530km 떨어져 있다. 제주도는 한반도의 변방이라 하지만 바다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일본‧한반도가 제주도의 변방이다. 고대 및 중세에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배, 한반도에서 남중국과 동남아를 오가는 배가 제주를 거치곤 하여 제주는 이렇듯 다양한 항로의 중간에 위치한 해양국가 및 해양센터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주에 눈독을 들이는 나라 또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진시황은 서복을 영주(한라산)로 보내 불로초를 구하고자 했고 한 무제는 영주에 사람을 파견하여 금광초와 옥지지라는 영약을 구해갔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를 도와 삼국통일을 이룬 당나라는 탐라국을 복속시키려 했고 원나라는 아예 탐라국을 100년 지배했다.
명나라는 원나라가 지배하던 제주를 탐내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는 탐라의 법화사에 안치된 동불상 3좌를 가져가겠다며 황엄을 사신으로 보냈다. 이 동불상은 원나라의 것으로 원나라를 접수한 명나라가 이어받는 것은 당연하다며 중국으로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황엄 자신이 직접 탐라에 건너가 실어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탐라를 먹으려는 명나라의 흑심을 눈치 챈 태종은 미리 사람을 보내 그 불상들을 실어와 황엄에게 전달함으로써 황엄으로 하여금 탐라에 발을 디뎌놓지 못하게 했다. 탐라는 조선의 안위를 위하여도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제주는 탐라국시대, 고려 전기에 역사에서 자기역할을 충실히 해왔지만 반대로 해양문화가 위축되고 해양교류가 활성화되지 못한 고려 중기 이후,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자기 본연의 역할을 상실하고 역사에서 소외당했으며 착취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근세에도 일본과 구미열강들이 제주도에 군침을 흘려왔다. 제주도의 지정학적 가치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