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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김천덕과 백호 임제

무굴도사 2023. 8. 10. 11:12

열녀 김천덕金千德과 백호白湖 임제林悌

 

권무일

 

곽지리의 김천덕은 선조11(1578) 임금의 하교에 의거 열녀로 정려(충신·효자·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마을 어귀에 붉은 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되었는데 수백 년이 흘러도 그녀의 이야기는 제주도 전역에서 인구에 회자되어 여자의 규문법도로 활용되었다. 제주도에 열녀는 많았다. 남편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몸 일부를 훼손하거나 남편 대신 죽거나 남편이 죽은 후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수절하는 등 여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많고 그리하여 정려비旌閭碑 또는 정려문이 세워져 있는 마을들이 꽤나 있었다.

그렇다면 곽지리의 김천덕은 누구이며 그녀가 유독 제주역사에서 다른 열녀보다 각광을 받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녀가 절세미인이면서 온갖 유혹을 물리친 삶이 모범적인데다 극적이었던 점, 제주도를 찾은 한 풍류객이 그녀의 미담과 행실을 임금께 보고하여 어명으로 열녀문을 세우게 된 점, 더군다나 그 풍류객(백호 임제)<김천덕전>을 써서 남긴 점을 들 수 있다.

 

조선 선조 10(1577)에 제주도에 잠시 머물던 28세의 임제林悌는 제주목사 임진林晉의 아들이다. 그는 대단한 문장가였고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한 선비였지만 젊은 시절을 기생집에나 드나들며 파락호破落戶처럼 지내다가 문득 마음을 다잡고 과거에 응시했다. 과거에 급제한 그는 아버지를 뵈러 제주도를 찾았다. 그해 동짓달 초9(119)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임제는 제주에 도착하기가 바쁘게 1122일 아버지가 집무하고 있는 제주목 관아를 뒤로 하고 제주도 일주에 나선다. 그는 말을 달려 조천포를 지나고 땅거미가 깔릴 무렵 김녕포에 이르렀다. 30여 호쯤 되는 마을에 100세에 이른 노인들 육칠 명이 꼿꼿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만나 그 비결을 물으니 불로초 덕분이라는 것이다. 한 노인이 대답하기를 불로초의 줄기는 등나무처럼 넝쿨이 있고 처음 싹튼 가지는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온 섬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처 성산포로 달렸고 뱃길이 위험하다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우도로 건너가 동굴탐험을 하면서 그 경이로운 풍경에 매료되기도 하였다. 그는 표선 해안에서 말달리기 경주를 하는 3명의 기녀들을 보았고 서귀포 해안절벽의 기암괴석과 폭포들을 눈여겨보았으며 산방산과 송악산에 들러 시를 지어 읊었다.

그가 대정의 송악산을 오른 뒤 말을 몰아 명월포를 거쳐 애월 곽지리에 이른 때였다. 곽지리는 제주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마을로 동으로는 애월리, 서로는 금성리를 끼고 있다. 금성리는 원래 곽지리의 외딴 자연마을이었으나 조선 말기에 분리되었다.

제주성까지는 60리 길이지만 급할 것이 없는 그는 이쯤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하고 주막집을 들렀다. 그는 거기에서 김천덕에 대해 들었고 곽지리에서 며칠 머물며 마을사람들로부터 그녀의 행실과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임제는 천덕의 시아버지 김청金淸 노인을 찾아갔다.(필자는 김청을 친정아버지가 아닌 시아버지로 상정했다.) 그 노인은 80세의 노령으로 인하여 귀가 먹먹하고 눈이 멀어있었다. 50세쯤 되어 보이는 과부며느리 천덕이 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임제가 그녀를 앉히고 몇 가지 물어보려 했으나 자신은 한 일이 없다며 고팡(곡식창고)으로 숨어버렸다. 임제는 정월 27일 제주성 서문에 도달하였다. 무려 66일간의 장정이었다. 그는 아버지 임진 목사와 조인후 판관에게 그가 제주도를 일주하면서 보고 느끼고 겪었던바 전후시말을 고했다. 특히 김천덕의 빛나는 행실의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여 아버지와 조인후를 감동시켰다.

임제가 체험한 내용을 일부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제주사람들은 바다 건너 조선사람들을 뭉뚱그려 육지사람이라고 부른다는 것, 밭 경계와 집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쌓은 것, 침실에 온돌이 없는 것, 여자의 옷은 치맛자락이 없고 짜른 베로 알몸을 가리는 것, 물을 나무통으로 긷고 물이나 땔감을 여자가 등에 지어 나르는 것, 남자는 공물 운반 등에 차출되어 선박 침몰로 익사하는 자가 많아 섬에 남자 수는 적고 여자 수는 많아져서 남자 한 사람이 많으면 여자들을 8,9명이나 데리고 사는 예 등이다.

특히 김천덕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임 목사는 조인후에게 임금에게 올릴 장계를 쓰게 하여 김천덕을 열녀로 정려할 것을 상신했다. 김천덕 열녀비는 선조11(1578)에 정문旌門과 더불어 건립되었는데 세월이 흘러 마모되었기에 철종14(1863)에 개비하였다. 지금 곽지해수욕장 입구에 있다.

백호 임제는 붓을 들어 제주관람기인 남명소승南溟小乘을 썼는데 그 안에 <김천덕전>을 실어 역사에 길이 남겼다. <김천덕전>을 읽기 쉽게 개찬하여 싣는다.

 

김천덕金千德은 곽지리 사람 사노私奴 연근連斤의 처로 젊고 재색이 뛰어났다.(김석익의 탐라기년에는 金天德 連根이라 표기되었는데 이는 원문과 상이한 기록이다.) 결혼한 뒤에 부부가 더불어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면서 오순도순 살아온 지 20,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은 공물수송에 차출되어 배를 탔는데 화탈도(관탈도) 부근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천덕의 피눈물은 해가 몇 번을 바뀌어도 마르지 않았다. 그녀는 3년여 상식을 폐하지 않았고 매월 삭망에, 그리고 절기마다 관탈도를 향하여 궤연几筵(신위를 모시는 자리)을 베풀고 제사를 지내며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었으므로 원근의 이웃들도 덩달아 그녀를 불쌍하게 여겨 마지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슬픔에 잠겨도 절세의 미는 사라지지 않은 터라 장안의 한량들이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부임하는 목사를 따라온 목사의 겨레붙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광패한 자들이라 무위도식하며 기방을 제집 드나들 듯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천덕을 취하려 했으나 천덕이 매몰차게 거절하는 바람에 관가에 고발하였다. 제주목에서는 까닭 없이 그녀에 매질을 가했다. 곤장이 80대에 이를 즈음 천덕은 생각했다. 이 몸은 비록 저 세상에 있어도 지아비의 것이고 더군다나 내가 죽으면 연로한 시아버지는 누가 봉양한단 말인가? 그녀는 매질을 멈추게 하고 협상을 제안했다. 남편을 기리기 위하여 고이 간직했던 옷 한 벌,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부리던 한 마리의 소, 그리고 무명 30필을 바치겠다는 것이다. 저 무고한 자는 웬 떡이냐며 입이 벌어졌다.

그 후에도 집적거리던 사람들이 끊이지 않더니 종내에는 명월진의 여수旅帥(조방장)가 군침을 흘리기에 이르렀다. 그는 사람을 놓아 천덕의 시부 김청에게 접근했다. 그는 자신의 권세로, 감언이설로 김청을 설득하여 결혼을 허락받았다. 정작 장본인 천덕은 모르는 일이었다. 결혼식 당일 이 사실을 안 천덕은 방성대곡하며 집에 불을 지르고 자신은 목을 매었으나 이웃이 이를 발견하고 그녀를 살려냈다. 그후 그녀는 삭발을 하고 더러운 옷을 입으면서 수절해 왔다.

내가(임제)가 그녀의 이야기를 곽지리 사람들에게 들었을 때는 그녀가 60세에 이른 때였는데 그녀는 80이 넘은 시아버지를 봉양하고 있었고 곽지리 사람 모두가 그녀의 효성에 감동하고 있었다.

 

임제는 말했다.

김천덕은 거친 남녘땅의 천민에 지나지 않는다. 배우지 못한 천민에게는 규문지범閨門之範(집안 부녀자의 예의범절)이 없을 것인데 어찌 여훈지규女訓之規(집안여인에 대한 교훈세칙)를 배웠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일심으로 남편을 섬기고 절조가 남달랐다. 그녀에게 순정한 천부적 자질이 있으니 맹자의 성선설이 어찌 참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남자라는 것들은 형제간에 다투고 친구 간에 배신하며 나라를 팔아먹는 자도 있고 어버이를 저버리는 자도 있으니 천덕 만한 자가 적으리라. 참으로 슬픈 일이로다.

생각건대 맹자의 성선설은 사단四端 즉 측은지심惻隱之心(타인의 불행을 아파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부끄럽게 여기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선악시비를 판별하는 마음)의 네가지 감정으로 각각 인의예지의 착한 본성에서 발로되는 것이다. 이 마음은 사람이 성별과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천적 능력이다.

임제는 가난하고 억눌린 천민에게서 맹자의 성선설을 확인했고 반면에 젠체하고 떵떵거리는 양반들, 남자랍시고 설쳐대는 자들에게서 인륜을 저버린 모습을 질타하고 있다. 역적으로 몰아 죽인 사람들의 처첩을 성 노리개 또는 노비로 삼았던 역사가 배어있는 조선의 상류사회, 천민과 여인을 비인간으로 취급해온 양반과 사대부들의 고정관념을 임제는 김천덕전에서 통렬히 깨어부수고 있는 것이다. 임제는 김천덕에게 감정적인 지지를 보내며 비록 천민이지만 그녀가 갖추고 있는 착한 본성을 이해하는 인간애와 신분을 초월한 인류애를 내세우고 있다.

 

제주를 한 바퀴 돌고 난 임제는 내처 한라산을 오른다. 210일 도근천을 거쳐 영실의 존자암으로 향했고 거기서 청순스님과 도가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눈보라가 거할 때까지 기다렸다. 한라산으로 오르는 길에 그는 우뚝우뚝 솟은 바위병풍을 건너다보며 오백장군이라 이름지었다.(후에 김상헌은 임제가 최초로 오백장군이라 이름지었다고 썼다.) 한라산에 올라서는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저 중국 동정호 700리 물도 이에 비하면 물 한 잔 쏟아놓은 웅덩이에 불과하다라고 일갈했다. 그의 호방하고 통 큰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말이었다.

임제는 제주도 일주, 김천덕 이야기 그리고 한라산 등반기를 엮어 <남명소승>을 썼는데 거기에는 제주도에 대한 지리·풍토·민속·토산 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개인적인 소회와 웅혼한 시를 남긴 제주여행기이다. 그는 4개월가량 제주도에 머물다가 15782월 말일에 제주도를 떠났다.

백호 임제는 자유분방하여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으로 인간애와 평등사상이 몸에 배어있었다. 그는 서북도병마평사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개성의 황진이 묘를 찾았다. 그는 술 한 잔 부어놓고 넙죽 절하며 시 한 수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을 어듸 두고 백골만 무쳣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업스니 이를 슬허하노라

 

이러한 그의 행각으로 인해 그는 부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삭탈관직되었으나 오히려 굴레를 벗었다고 좋아했다.

그는 산천경개 유람하며 광인 같이 살았고 술과 퉁소를 사랑했다. 그는 호협하고 순결한 시인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신의 나라를 꼬마중국(소중화小中華)이라 폄훼하는 데 대하여 몹시 분개했다. 그는 39세에 한 많은 세상을 버렸는데 눈을 감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방 여러 나라가 황제라 칭하지 않은 적이 없거늘 우리나라만 고래古來로 그래 보지 못했다. 이런 나라에 태어났거늘 내 죽는 것이 무에 애석한가? 곡하지 마라.

 

그는 대자아의 활연한 호연지기로 살다가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1,000여 수의 시문을 남겼다. 그의 도가적 학풍은 외손자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