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마공신 김만일 정신의 재조명
권 무 일
작가의 변
60성상을 살면서 어느 분야에도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던 내가 제주에 정착하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제주 사람들이 살았던 행적이었다. 이는 역사탐구로 이어졌다.
13년전 한 지인이 역사 속의 인물 김만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전설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전설적인 황당한 일들이 다소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헌을 뒤쥐다가 나는 전설과 역사 속에서 김만일이라는 인물이 단 한 마리의 말로 시작하여 무려 10,000여 마리의 말로 불렸고 전쟁통에 그가 수천 마리의 전마를 (때로는 손수 몰고 가서) 국가에 바친 사실을 찾아냈다.
나는 문득 내가 반평생을 바친 현대그룹을 회상하면서 그룹총수 정주영을 떠올렸다. 그는 소 판 돈을 들고 가출하여 격동의 시기에 국내 최고의 재벌이 되었고 손수 키운 소 500마리를 트럭에 태워 휴전선을 넘었다.
나는 450여 년 전에 제주에 살았던 김만읠의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마치 문화유산을, 아니 묻힌 값진 유물을 찾는 심정이었다. 그에 대한 자료는 별로 없었으나 그가 활동하던 무대, 즉 그가 말을 키우던 평원은 남아있었다.
김만일은 왜 그 많은 말들을 키웠을까? 단지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는 말이 국력의 상징임을 알았기에 그의 시선은 나라의 현실과 장래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역사서 또는 평전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이 소략하고 고증하기도 어려운 사건들을 놓고 이론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역사적 사실의 바탕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행간을 채워나가기로 했다. 마치 땅속에 묻혀 잔해만 남아있는 뼈마디를 맞추어 살을 붙여나가는 작업을 나는 시도했다. 바로 역사소설의 탄생이다.
김만일金萬鎰은 누구인가
김만일은 1550년, 즉 조선조 13대 임금 명종 5년에 제주도 남원의 의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200명의 왜구들이 천미포에 들이닥쳐 주민을 살상하고 식량을 약탈한 천미포 왜란, 이어서 1,000여 명의 왜구가 제주성에 난입했을 때 제주 사람들이 합심하여 물리친 을묘왜변이 일어나던 소란스러운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경주김씨의 후손으로 김인찬의 8세손이다. 김인찬은 고려말 이성계가 함경도에서 원나라 세력을 무찌를 즈음에 합류하여, 쫓기는 원나라 잔당을 토벌하기 위하여 만주를 누비고 다닐 때도 그를 따랐고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다. 그는 배극렴·조준·정도전 등과 더불어 이성계를 조선의 초대왕으로 추대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성계가 등극하고 한 달도 안 되어 사망했지만 조선 태조 이성계는 그를 개국일등공신으로 추서했다. 김인찬의 아들 김검룡이 제주도로 입도하였는데 이후 자손들은 관계에 진출한 적이 없이 한미한 가계를 꾸려왔다.
김만일이 성장하던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김만일이 수망리 문서봉의 딸과 혼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나의 소설에서는 처가에서 한 마리의 암말을 얻은 후 이 말을 통하여 한라산의 야생마의 씨를 받아 이 씨수마를 보존하고 종자개량을 한 것으로 묘사했다.
전설에 의하면 김만일의 처가(문서봉)는 수망리에서 사설목장을 운영했고 김만일의 수말이 그 목장을 들르자 100마리의 암말이 그 수말을 따라왔고 김만일이 그 말을 처가로 되돌려보냈지만 다시 암말 100마리가 따라오는 지경에 이르자 장인은 아예 김만일에게 그 100마리의 말을 건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김만일은 그 말들을 끌고 한라산 동쪽의 대평원으로 달려갔다. 제주도의 고원지대는 춥고 물이 없고 잡목과 가시덩굴, 돌들이 나뒹구는 황폐한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만일은 거기에서 말을 키우기 시작했고 지속적인 종자 개량과 각고의 노력으로 말들을 번식시켜 나중에는 10,000마리가 뛰노는 대목장으로 만들었다. 여러 문헌들에 의하면 김만일의 말은 국내의 여느 말보다 덩치가 커서 임금의 어승마 또는 전마戰馬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한 마리의 말로 시작하여 수십 년간 일만여 마리까지 말의 수를 불리는 과정에는 남다른 지혜와 각고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고 제주도민들에게 일자리와 의식주의 제공, 말에 관련된 다양한 산업의 발달 등에 많은 공헌을 했을 것이다.
김만일은 명종·선조·광해군·인조 등 네 왕을 거치면서 82성상을 살았는데 그간 천미포왜란-을묘왜변-임진왜란과 정유재란-광해군 등극에 얽힌 여러 사건들-명·청의 각축-강홍립의 만주원정-광해군의 실각-이괄의 난-정묘호란-이념논쟁 등 격동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이는 한국의 현대사와 매우 유사하다. 태평양전쟁-민족해방-제주도 4·3-6·25-4·19-5·16-군사독재-5·18-문민정부-이념논쟁···
이 힘든 시기에 김만일은 인류사에 기록할 많은 업적을 이뤘다. 이는 가문 또는 제주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 말은 국력國力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말 특히 전마를 중시하고 활용한 민족과 국가는 흥했고 영토를 넓혀 대국이 되었지만 말의 용도를 모르는 민족은 그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한 무제는 대완국(우즈베키스탄·키르키스탄)에서 세계 최대 최강의 말(대완마 또는 한혈마)를 사들이고 번식하여 중국영토를 넓히고 고조선을 멸망시켰으며 몽고의 칭기스칸은 달단마(몽고마)를 타고 저 서역까지 사막과 평원을 누비어 세계를 제패했다. 당나라 때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은 철총마를 타고 파미르 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를 공략하여 중국의 위상을 서역에 알렸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때부터 말을 키워 먼 거리의 이동, 물자의 운송뿐만 아니라 전쟁에 이용하였다. 고조선은 말의 힘으로 조선반도와 요동·요서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고, 고구려는 말의 힘으로 고조선이 다스리던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했고 그 광대한 영토는 발해국이 이어받아 통치했다. 이렇듯 광활한 영토를 다스린 역사적 사실은 말에 힘입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마를 탈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완력이 있고 무예가 뛰어나도 장군이 될 수 없다. 신라의 화랑은 기마전을 익혔기에 삼국통일에 기여할 수 있었다.
고려 예종 때 윤관 장군은 기마병을 이끌고 만주로 쳐 올라가 백두산에서 700리 지점인 공험진에 9성을 쌓아 영토를 넓혔다. 이성계는 팔준마를 갈아타면서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에 빼앗겼던 동북면(함경도)을 되찾고 서북면(평안도와 만주 일부)을 회복시키는 한편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올라산성까지 점령했다.
세종 때 김종서 장군이 육진을 개척하고, 세조 때 남이 장군이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을 공략하여 올라산성을 점령한 것 또한 말의 힘이었다. 그러나 남이(南怡), 강순(康純) 등 무장들이 반역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후 120년간은, 이 나라에 장군도 없고 나라를 지킬 군사도 지리멸렬한 상태로 바뀌었다. 기마병이 없으니 전마가 필요하지 않았고 전마가 없으니 기마병도 더불어 사라지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꿰뚫고 있는 청년 김만일은 일찍이 정도전이 주장했던 것처럼 말은 국력이라는 것을 알았고 율곡 이이의 주장처럼 장차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율곡이 그렇게도 외치던 전마 양성은 머나먼 섬 제주도에서 김만일의 손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었다.
3. 김만일은 어떤 말을 키웠는가
고려 때 몽고가 탐라를 100년간 지배하던 시절, 몽고는 달단마 즉 몽고마를 탐라의 넓은 평원에 풀어 방목하였고 서역의 대완국에서 탈취한 대완마 또한 탐라에 보내어 사육하게 되었다. 특히 고려 여인으로 원나라의 황후가 된 기황후는 궁중에서 키우던 자신의 대완마 수십 마리를 탐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몽고마는 키가 4자 내지 4자 반쯤 되고 몸집이 통통하고 목이 짧으며 다리는 대원마보다 짧았다. 몽고마는 칭기스칸이 중국대륙과 서방을 정복할 때 사막과 평원을 누비던 전마의 후예다. 대완마는 키가 6 내지 7자쯤 되고 다리가 길고 몸집이 날렵한 말인데 일찍이 한무제가 대완국에서 사들여 중국에서 키우고 종자를 번식하였으며, 몽고가 서역을 점령하면서 탈취하거나 수입했던 말이기도 하다.
탐라에서는 이 두 종류의 말이 사육되면서 자연스럽게 교잡이 이루어졌고 여기서 태어난 말이 조랑말이다. 조랑말은 작은 말이라는 뜻이 아니다. 조랑말은 상하의 진동 없이 매끄럽게 달리는 주법을 의미하는 몽고어 조로모리에서 유래한 말이며 다른 말로 제주마, 또는 탐라마라 부르기도 한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대완마, 몽고마, 그리고 조랑말이 공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조랑말은 몽고마의 우량유전인자 영향으로 강건한 체질을 갖추고 있고 특히 발굽이 치밀하고 견고하여 암석이 많은 제주도에 오래 적응되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조랑말은 그 체구가 왜소해지고 있었다.
탐라의 준마로는 이성계의 응상백(凝霜白)이 유명하다. 이성계가 요동을 치러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의 말로 이성계가 타던 팔준마(八駿馬) 중의 하나였다. 응상백은 눈이 샛별처럼 빛나고 체형이 강하며 배가 불룩하고 목이 밭은 점으로 보면 몽고마를 닮았고 다리가 가늘고 훤칠한 걸 보면 빨리 달릴 수 있는 대완마를 닮기도 했다. 즉 몽고마와 대완마의 교잡종으로, 전마로서는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을 것이다.
최영이 소위 목호의 난을 진압한 후 탐라의 좋은 말들은 육지의 여러 목장으로 옮겨가거나 고관대작들이 자신의 개인목장으로 실어가는 바람에 제주도에는 지스러기 말밖에 남지 않았다. 조선 초기, 종마를 보존하여 준마를 키우는 목장도 있었고 임금이 타는 어승마와 궁궐에 보관하여 왕자들과 공신들에게 나눠주던 내구마(內廐馬)를 키워 진상하던 목장이 남아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조정과 고관대작들은 준마의 생산과 보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공용 또는 사용으로 준마만을 간택하여 반출하는 바람에 말(몽고마)은 왜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본시 말은 끊임없이 영양관리와 종자개량을 하지 않으면 점차적으로 왜소해지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이를 한탄하여 북방 야인들의 말을 사들여 종자개량을 하자는 건의를 한 사람도 있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주도의 국영목장에는 이미 왜소한 조랑말 밖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김만일은 그 조랑말의 우수한 유전인자도 예의주시했고 고려말 제주목장에서 성장해온 준마들인 대완마와 몽고마의 후예들이 한라산 고원지대를 누비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만일은 이 세 종류의 말의 우성인자를 여러 번 교배시켜 특유종의 준마 즉 산마山馬를 탄생시켰다.
4. 제주의 역사는 말의 역사다
제주도에는 태곳적부터 말이 존재했다. 야생마도 있었고 가축으로 키우는 말도 있었다. 제주도의 옛 이름인 탐라에서는 선사시대부터 말을 가축으로 사육하여왔다는 기록이 있다. 〈삼성신화〉에 의하면 태초에 탐라에 처음 정착한 고을나·양을나·부을나가 오곡을 파종하고 말과 소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선사시대부터 야생우마가 한라산 밀림지대에서 농경민들과 더불어 유목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탐라는 자연환경으로 보더라도 사시사철 기온이 온화하고 풀이 무성하며 산간에 넓은 평원이 있고 호랑이가없는 곳이라 말을 방목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애초에 탐라의 재래마는 체구가 작은말로 토마, 향마 또는 과하마果下馬라고 불렀다. 말을 타고 과일나무 밑을 지나는 말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농경에 이용하던 말로 짐작된다. 탐라에서 말이 본격적으로 사육되고 목장이 형성된 것은 아무래도 몽고가 고려를 복속시키고 탐라를 자치령으로 만든 때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고 제주도를 둘러보던 몽고인들은 탐라의 넓은 평원과 온화한 기후가 말을 방목하기에는 매우 적절하다고 판단했고 더욱이 일본과 남송을 공략할 전진기지로 탐라가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몽고 즉 원나라는 아예 탐라를 고려에서 떼어 직할령으로 만들어 고려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했고 탐라를 자기네 말 목장으로 만들 욕심을 가졌다. 원나라는 고려 충렬왕 2년(1293)에 탐라의 동쪽 수산리에 목장을 설치하고 168마리의 몽고말을 실어다 방목하기 시작하고 말들을 감독하기 위하여 몽고인으로 목호(牧胡)를 두었다. 처음에 몽고에서 들여온 말들이 증산을 거듭하면서 목장의 말은 기하급수로 늘어나 한때 40,000마리를 능가했다. 이에 탐라에는 고원지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땅이 말 목장으로 화했다. 탐라의 농경지는 거의 자취를 감췄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말 목장에 의존해서 살았다. 몽고가 탐라를 100년 지배하는 동안 몽고는 매년 수만 마리의 말을 징발하여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전방에 투입하였다.
세종 때에 제주 출신 고득종은 제주 백성들의 삶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장을 국영화하고 목구를 10개로 나눌 것을 주창했고 농경지를 보전하고 목장을 합리적으로 획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세종은 고득종의 건의를 받아들여 목장조직을 체계화했다. 말하자면 해안지대를 농경지로 정하고 목장을 중산간으로 올리게 했고 농경지와 목장 사이에 잣담을 쌓게 했다. 한라산을 정점으로 해발 200-400m의 중산간을 빙 둘러 펼쳐진 넓은 평원에 10개의 목구를 설치하여 국마목장을 만들었고 이를 10소장(所場)이라 불렀다. 10개 소장은 후에 제주의 행정구역과 비슷하게 되었다. 1소장은 구좌에, 2소장은 조천에, 3소장은 제주성 인근에, 4소장은 제주성 서쪽 주변과 애월에, 5소장은 애월에, 6소장은 한림과 한경에, 7소장은 대정에, 8소장은 안덕에, 9소장은 서귀포와 남원에, 10소장은 표선과 성산포에 각각 설치되었다. 이들 소장은 지세와 지형에 따라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지만 평균으로 칠 때 각 목장의 둘레가 약 50리에 달한다.
각 소장에는 적게는 500마리, 많게는 1,500마리를 능가하는 말을 방목했고 또한 소도 키웠다. 조선시대 제주의 국마목장에는 통틀어 5천 내지 일만 마리의 말들이 있었다. 각 소장은 몇 개의 자목장(字牧場)으로 구성되었는데 말에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자문을 낙인하여 관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자목장마다 대략 암말 100마리, 수말 15마리로 군을 이루고 있었다.
제주의 목장은 제주 목사가 총괄·관리하였고 소장마다 한두 명의 감목관 또는 마감을 두었으며 자목장에는 한 명의 군두(群頭), 두 명의 군부(群副), 4명의 목자(牧者)를 두었다. 목자는 최하위 직급으로 말의 양육과 생산을 담당하였는데 토착민 중 양인으로 채워졌다. 목자는 흔히 테우리라 부른다.
국마목장에서 키운 말을 국가에 바치는 것을 공마(貢馬)라고 하는데 제주 목사의 책임 하에 매년 200마리를, 매 3년마다 식년(式年-子, 卯, 午, 酉)에 600마리를 바쳤다. 또한 삼명일(三名日), 즉 임금의 탄신일, 동지, 정초에 각각 20마리를 보냈다. 국마목장에서 키운 말들은 궁중에서 소용되는 내구마, 파발마, 지방으로 부임하거나 암행어사들에게 지급되는 쇄마 혹은 운송용으로 이용되었다.
실로 제주도는 몽고가 목장을 개척한 이래 국마목장과 산마장을 아울러 600년간 사람과 말이 어우러져 살았고 말과 관련된 애환이 서려있던 섬이기에 제주의 역사는 사람과 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산마, 산마장
청년 김만일은 뜻한 바 있어 한 마리(또는 두어 마리)의 말을 이끌고 혈혈단신 한라산 동쪽의 고원지대로 달려갔다. 물이 없고 바람이 많으며 기온이 낮을 뿐만 아니라 온통 돌과 잡목으로 뒤덮인 곶자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해발 400m로부터 700m쯤 되는 한라산 중턱이었다. 때로는 말들이 한라산 산정 그리고 백록담까지 접근하여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말의 달인이라는 몽고인들도 감히 손을 못 댔고 국마목장을 건설한 세종도 엄두를 못 냈던 높고 황량한 벌판과 비탈과 오름이었다.
김만일은 나무를 베고 돌을 옮기면서 종국에는 광활한 평원과 오름들을 아우르는 수천만 평의 대목장을 건설했고 증산을 거듭하여 수십 년 후에는 무려 10,000여 마리로 번식시켰다. 이는 제주도 국마목장 전체에서 키우는 말들의 수와 버금가거나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종자를 개량하여 몽고마를 능가하는 준마를 생산했고 전마(戰馬)에 걸맞도록 자신의 말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추위를 무릅쓰고 성장한 김만일의 말은 야생마와 다·름없는 크고 강인한 말이었다.
김만일의 산마장은 한라산 산록의 동쪽, 고원지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물영아리오름·대록산·백약이오름·바농오름까지 약 2,000만 평의 대평원과 오름들이 그의 목장이었다. 이 목장은 자손대에 이르러 녹산장·상장·침장으로 구분하여 관리하였다.
척박한 땅에서 추위를 무릅쓰고 성장한 김만일의 말은 야생마와 다름없는 크고 강인한 말이었다. 김만일은 제주에 남아있는 준마들에게서 우성인자를 찾아 암석을 밟고 험준한 산을 오르내리며 추위에 견디는 품종을 개발하고 훈련시킴으로써, 산악지대가 많은 조선반도와 나아가서 만주의 동토에 적응할 수 있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김만일이 개척한 마장을 사람들은 산마장이라 불렀고 거기서 키우는 말을 산마라고 불렀다. 김만일의 산마는 대완마 및 몽고마와 비견할 만하고 조랑말과 구별되는 한 갈래(별종)로 자리매김했으며 왕과 신하들까지도 고유명사처럼 불러댔다. 산의 마장이 산마의 장(마장)으로 진화한 것이다. 김만일의 산마는 그 성능이 해외에까지 알려져 중국의 고관들이 여러 핑계로 산마를 얻으려 했고 얻어갔다. 후술하겠지만 수천 마리의 산마들이 국경을 넘었다.
당시 제주에 부임한 수령들과 군관들은 허우대 좋은 산마를 얻기 위하여 김만일의 산마장에 몰려왔고 회유와 협박으로 김만일의 산마를 갈취하여 육지의 고관들에게 뇌물로 바치거나 사복을 채우려 했고 심지어는 종마마저도 끌어가려 했다. 김만일은 이에 과감히 맞섰고 종마의 보존을 위하여 애지중지하는 종마의 눈을 송곳으로 찌르고 귀를 찢고 잔등을 칼로 그으면서까지도 종마를 지켜 산마의 맥을 이어갔다.
6. 제주사람이 전마를 바쳤다.
1592년, 김만일의 나이 42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조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 의주로 몽진했고 왜적은 불과 20일 만에 도성에 입성하였으며 전라도를 제외하고 조선의 7도가 왜적에게 짓밟혔다.
명나라의 원병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왜적이 도성을 비우고 남쪽으로 물러나자 선조임금은 일 년 반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온 강토는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더욱이 전국에 산재해 있던 말들은 씨가 말랐다. 왜적에게 빼앗기기도 하고 군사들과 파발들이 말을 끌고 탈영하고 굶주린 백성들이 잡아먹었기 때문이었다. 말이나 소가 없어 군진으로 군수물자를 보내는데 사람이 지고 가야 했고 파발마가 없어 뜀박질 잘하는 사람을 시켜 전장의 소식을 알려야 했다.
그때 김만일은 500마리의 전마를 바치기로 하고 우선 100마리의 산마를 끌고 부친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보무도 당당히 서울로 향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때라 비변사의 조언에 따라 나머지 400마리(또는 500마리)는 나중에 보내기로 하고 당분간 별목장에 보관하기로 했다. 임금은 김만일의 의기와 충성심에 크게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주사람이 전마를 바쳐온바 해외 사람으로 이런 의기가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아울러 상을 내리고 직을 제수하라. 그가 직접 올라왔으니 더욱 가상한 일이로다. 그에게 각별한 상을 내리도록 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는 김만일을 종2품인 중추부동지사 겸 가선대부로 임명하고 부친 김이홍을 자헌대부(낮은 단계의 정2품)로 서품했다. 아버지에게까지 서품한 것으로 보아 김만일은 그때 공신(헌마공신)의 작위를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7년 왜란이 끝난 후 명나라의 병부상서 형개刑玠가 조선으로 달려와 재조지은再造之恩(명나라가 도와준 은혜)으로 은 3만 냥과 산마 2,000마리를 요구해왔다. 꼭 집어서 산마라 했다. 이는 산마의 성능이 중국에 알려진 연유다. 점마별감이 임무를 띄고 김만일을 찾았으나 김만일은 1,000마리의 산마만 올려보냈다.
7. 광해군이 김만일의 말을 사다
선조에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큰 고민에 빠졌다. 만주에 무서운 세력이 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루하치가 후금(후에 청나라)을 세우고 여진족을 통합해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유목민이고 기동력과 파괴력이 천하무적이며 여진족은 말 잔등에서 태어나 말 잔등에서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말달리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어떠한가? 남이장군 사후 120년간 살얼음 같은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왜란이 끝난 지 몇 해 되지 않았음에도 나약한 군졸, 불평만 늘어놓는 백성, 허술한 성곽, 녹슨 무기, 변방에는 말도 없고 기병도 없었다.
조정신하들은 누루하치를 좀도둑 정도로 치부했고 그들 뒤에 막강한 명나라가 있는데 임금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면서 사색당파로 나뉘어 서로 물고 뜯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광해군은 첩자를 보내 후금의 정세를 염탐했고 천하통일을 꿈꾸는 누루하치의 야망을 감지했고 바야흐로 조선이 풍전등화의 형국임을 감지했다. 그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양다리외교(기미책)를 펼쳤다.
“우리의 병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소. 한편으로는 저들을 달래고 다른 한편으로는 힘을 키우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오.”
광해군은 김만일의 산마를 사서 전쟁에 대비할 결단을 내렸다. 신하들이 불평했다. 김만일은 임금(나라)의 백성이고 산마장은 임금의 땅이며 거기서 키운 말은 임금의 말인데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광해군이 엄명을 내렸다.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김만일이 흥이 나서 전마를 키우겠는가? 짐의 말대로 하라. 김만일의 산마장에서 누구라도 대가 없이 말을 반출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암말은 반출을 엄금한다.”
조정에서는 말 한 필당 쌀 20석 또는 목면 1동을 쳐주고 말을 사기로 했다. 수천 필의 말이 수년간(광해군4년-10년) 실려나가 변방에 배치되었다. 기마병과 말이 한 몸이 되어 훈련시키도록 수망아지도 차출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암말과 씨수마와 더불어 1,000마리의 수말(전마)은 남겨두도록 배려했다. 명나라 경략(주둔군사령관)이 김만일의 산마를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해 왔고 그에게도 100-200필을 준 기록이 있다. 말의 대가로 받은 많은 면포와 쌀은 제주사람들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8. 만주원정
광해군 10년, 후금이 6만여 명의 기마부대 팔기군을 앞세워 명나라 침공을 감행했다. 명과 후금의 교역지인 무순성을 후금이 하루아침에 점령한 것이다. 후금의 전마는 몽고마보다 크고 강인하여 철마鐵馬라 불렀고 기마병을 철기鐵騎, 그 기마부대를 팔기군八旗軍이라 불렀다. 급기야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미적거리다 명나라의 재촉과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원병을 보냈다. 활부대 3,500명, 조총부대 3,500명, 기마대 3,000명 그리고 치중대(군수품 수송을 담당하는 부대) 3,000명 등 도합13,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만주 동토로 파병했다. 기마대의 전마는 물론 김만일이 보내 훈련시킨 말들이다. 광해군은 출병에 앞서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라’며 항복해도 좋다는 언질을 주었다.
원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석 달 만에 명나라 일진 10만 명과 합류했다. 조명 연합군이 총공세를 펴자 기다렸다는 듯이 후금의 팔기군이 선발대를 짓밟았다.활부대가 선발로 나서다가 치명상을 당했고 명군 10만 명이 전멸했다.
누루하치는 조선의 나머지 군대를 공격하지 않고 끈질기게 항복을 종용했다. 누루하치에게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조총(광해군은 왜란 후 일본으로부터 조총을 수입하거나 제작하여 조총부대를 훈련시켜 왔다.)과 제주의 산마를 차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강홍립은 항복했고 광해군 그리고 김만일은 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10년 동안 공들여 키운 전마는 북녘땅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강홍립은 동행한 장군들과 더불어 후금에 억류되었다. 이제 이 나라에는 믿고 맡길 만한 장수도 없고 나라를 지켜야 할 군사도 사라졌다.
9. 오위도총관
광해군 12년, 광해군이 허탈해하고 있을 때 김만일이, 남겨두었던 전마 500마리를 끌고 도성에 나타났다. 낙담해 있던 광해군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날듯이 기뻐했다. 임금은 김만일을 정2품의 오위도총관에 임명했다. 오위도총관은 임금을 수호하고 도성을 지키며 지방군을 통솔하는 자리로 지금으로 말하면 합참의장쯤 되는 직책이며 당시에는 원로대신이나 국구 즉 임금의 장인이 추대되는 자리였다. 신료들이 떼를 지어 반대하고 나섰다.
“김만일은 섬에 사는 한 백성에 불과합니다. 그가 전후 바쳐온 말이 그 수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라도, 그가 바쳐온 수만큼 비단이나 면포나 미곡으로 값을 쳐주는 것은 좋지만, 어떻게 감히 그 보답을 벼슬로 할 것입니까?”
김만일의 말들을 면포나 미곡을 주고 사오자고 할 때 반대하던 신하들이 이제는 김만일에게 벼슬을 주느니 차라리 말의 값을 쳐주자는 것이다.
김만일은 3개월 정도 그 자리에 머물다가 툭툭 털고 제주로 돌아왔다. 신료들의 시기와 질투도 있었지만 제주의 드넓은 대평원과 자식 같은 말들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일 것이다.
임금은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김만일의 조상들에게 증직贈職(김검룡 훈련도감, 조부 휘보 참의, 부친 이홍 참판)하고 자손들에게 음직蔭職(대명 보성군수, 대성 용양위부사직 절충장군, 손자 려 제주변장 겸 무겸선전관)을 주었다. 이는 일등공신에게나 내리는 특례라고 할 것이다. 이로 볼 때 김만일이 헌마공신을 제수받았다는 근거로 충분한 것이다.
1623년(광해군14년) 광해군은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등의 반란으로 폐위되었다. 소위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은 나라의 만년대계를 위하여 멀리, 너무 멀리 보았기에 박엽, 정준 같은 역전의 노장들은 북변에 보내고 바로 코앞에서 우굴거리는 반역의 무리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정권을 찬탈한 자들은 국제정세에 어둡고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에 망해가는 명나라의 꼬리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명목은 첫째 명나라에 사대하지 않은 점, 둘째 무리하게 궁궐을 중수한 점, 세 번째가 인목왕비를 폐모한 점이었다.
10. 간옹艮翁 이익李瀷
선조의 정비에게는 소생이 없는지라 후궁의 아들인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장차 닥칠지도 모르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선조의 계비 인목왕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이 당시 3살이지만 그가 적장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영창대군이 성장했을 때 왕위계승의 논쟁을 배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을 쥐락펴락하던 유희분, 이이첨 등의 모략에 의하여 영창대군이 유배지 강화도에서 살해되고 외할아버지 김제남은 사형에 처해지고 인목왕비는 폐출되었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일 생각은 없었고, 단지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평생 호의호식하도록 조치했으나 간신들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에 말단 언관이라 할 수 있는 사간원 정언인 이익이 비판의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익은 제주로 유배 온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김만일은 40대 초반인 이익을 사위로 삼았다. 이익은 일찍이 상처해 있었다. 당시 목사인 이괄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유배중인 그를 동몽교학童蒙敎學으로 앉혀 제주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그들은 광해군 11년에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아들 인제를 낳았다. 이익은 제주성 내에서 서당을 열어 문하생을 길러내고 있었는데 제자들 가운데 고홍진, 김진용 같은 걸출한 학자가 나왔다.
이익은 유배에서 풀려나 처자를 뒤에 두고 상경하였다. 그는 사헌부장령으로 임명되었으나벼슬도 마다하고 고향 충주로 발길을 돌렸다. 곧 처자식을 맞으러 떠날 채비를 하던 중 제주를 떠난 지 11개월만에 달리는 말에 치어 목숨을 잃었다. 인제는 서울로 올라가 이복형 인실의 보살핌을 받아 과거에 합격하고 정4품 훈련원 판관을 지내다 제주로 내려왔다. 그의 손자 이윤의 가장家狀에는 ‘할아버지는 헌마공신 김만일의 딸에게 장가들어 훈련원 판관 인제를 낳았으며···’라는 대목이 전해진다.
11. 인조 숭정대부를 서훈하다
인조 5년 청나라는 광해군 폐위의 원수를 갚겠다며 압록강을 건넜고 강홍립을 선발대로 내세웠다. 강홍립이 끌고 간 말들이 자신의 고향을 역습한 것이다. 청군은 임진강을 건널 태세를 보이면서 강홍립을 인조가 몽진한 강화도로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청군은 조선과의 형제의 의를 맺음과 아울러 청 왕자 홍타시에 바칠 김만일의 산마 200마리를 요구했다. 김만일은 산마 240마리를 올려보냈다.
청군이 물러가고 인조가 강화도에서 환궁하니 도성에는 전마는커녕 파발마나 운송마도 남아있지 않았다. 신료들은 김만일의 산마를 대가 없이 끌어오자며 떼로 몰려 억지를 부렸다.
“김만일의 말이 무려 10,000마리나 된다는데 그 말들은 이 땅에서 낳아 이 땅에서 나는 풀을 먹으며 자랐고 조선의 땅 한라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김만일이 말을 키운 것은 국가의 은혜인바 그 10분의 9를 가져와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2,000마리를 가져오는 것이 무에 문제인가?”
의론 끝에 조정에서는 김만일에게 아무 대가 없이 500마리를 올려보내도록 지시했다. 인조는 그 대가로 78세의 김만일에게 명예직인 종1품의 숭정대부를 서훈했다.
12. 김만일의 정신과 위상
김만일은 1632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김만일의 산마장은 김만일 가의 공동목장으로 운영되었고 효종 때부터 230년간 종6품의 산마감목관의 직책이 주어지면서 세습되었다. 종6품은 정의, 대정 현감과 동일한 품계였다.
결과적으로 김만일이 산마장을 개척한 뒤로 약 300년간 저 드넓은 산마장은 김만일 가의 목장이었다. 300여 년간 하나의 가문이 관직을 유지했거나 관직이 세습된 경우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왕조 말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예라 할 것이다.
김만일은 한미한 가정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꿈은 한라산만큼이나 크고 높았다. 그는 당시 아무도 밟아보지 못했고 생각조차 못했던 한라산 기슭의 고원으로 한 마리의 준마를 끌고 달려갔고 무려 10,000마리의 대목장으로 만들었다. 그는 말의 종자를 끊임없이 개량하여 몽고마를 능가하고 서역마와 어깨를 겨루는 산마라는 별종(갈래)을 대량으로 번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의 말은 준마요, 용마요 마왕이었다. 아니 김만일 자신이 마왕이었다.
당시 동북아의 정세는 일본의 도요토미가 조선반도를 거쳐 중국까지 넘보며 천하통일을 꿈꾸고 있었고 대륙에는 명나라가 그 운을 다하면서 만주의 누루하치가 중국을 공략하던 미증유의 격동기였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색당파로 나뉘어 당쟁으로 여념이 없었고, 임진왜란, 정유재란,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몰락, 이괄의 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이 끊임없이 발생하는데도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출세영달과 가문의 영화를 위하여 편을 갈라 싸우고 있었다. 더욱이 관리들은 착취와 가렴주구로 백성을 못살게 굴었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져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암울한 시기에 멀고 먼 탐라에서 한 줄기 빛으로 우뚝 선 김만일은 묵묵히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서 나라사랑의 정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김만일의 행적과 위대한 업적을 새삼 돌이켜보면 그는 한라산을 포함한 제주도의 대부분 지역을 말의 산지로 만들었고,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준마를 생산하여 키웠다. 그는 말은 국력이며 군력軍力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전마를 나라에 바쳐 국난의 시기에 나라에 크게 공헌하였다. 김만일은 중앙요직에 우뚝 서 출세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툭툭 털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직업의식과 소명의식은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일이다.
실로 김만일은 나라 건너의 땅, 변방의 땅에서 착취와 멸시를 받아온 백성들의 수동적 자의식을 극복하고 제주인의 자존과 정체성, 그리고 제주의 가치를 만방에 알린 거인이며 국난에 대비한 그의 헌신과 우국충정은 역사에 길이 기록될 쾌거인 것이다.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돌이켜보면 장군의 승리, 군사의 용맹성과 미담은 기록되어 있어도 전쟁 물자를 공급한 이야기는 가려져 있다. 그러나 김만일이 평생 일궈온 업적은 말과 전쟁의 역사, 아니 한국의 역사와 세계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