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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기일에-아내의 사모곡/권무일

무굴도사 2024. 6. 19. 10:08

머언 곳으로 여행 떠나신 어머님깨 몇 자 올립니다

 

며느리 노인숙

 

생전에 뵙지 못했던 어머님을 생각하며 무일의 처 인숙이 처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어머님은 1905년생이셨지요. 16세의 어린 나이에 권갑주씨와 연을 맺어 72녀를 기르셨지요, 생전에 세 아들을 먼저 보내시고 험한 세월에 고생만 하다 생을 마감하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뵙지는 못 했지만 가슴이 아려옵니다.

저희가 만난 때는 1969년 가을이었습니다. 어머님은 58, 너무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지요, 남편과 만났을 때는 이미 6년이나 지났지만, 어머니 이야기를 자주 하며 가끔은 눈물을 흘리곤 했답니다.

그 당시 농촌에서 먹고 살기도 힘들 때 농번기엔 농사 일로, 농한기엔 행상으로 아들 셋을 교육시키시느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어머님이기에 아들은 더 애달파했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 몰랐다며 비통(悲痛)해하며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저도 아들 둘을 키웠지만 제가 없을 때 제 아들들은 어머니에 대한 정이 그리 깊지 않을 듯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기쁜 일이나 힘든 일이 생겨안 플릴 때도 부모님 생각하는 제 남편을 보면, 어머님께서 고생 하셨지만 아들이 늘 기억하고 고마워하니 보람은 있으신 듯 합니다. 생전에 아들에게 속마음도 터놓으시고 귀애하셨다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의 당당함과 긍지를 남편에게서 저는 봅니다.

어머님께서 가시기 전, 아들에게 내년에 꼭 대학교에 가라고 유언을 남기셨다지요. 다음 해에 꿈속에서 엄니가 천도복숭아를 주셨대요. 그 덕분에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답니다. 시험날 밥도 굶고 걸어서 시험장에 갔다지요. 저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패기만만한 할 수 있었던 제 남편은 모두 어머님의 교육과 사랑 덕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두 아들에 예쁘고 착한 두 며느리와 손자손녀 4명과 함께 10명의 대가족이 되었답니다. 두 아들은 이 사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맏손녀인 세영은 내년 봄에 결혼을 약속했다니 저희 생전에 증손주까지 볼 가능성이 있답니다.

가끔 남편은 어머님을 생각하며, 살아계셨다면 저를 많이 좋아하시고 아끼셨을 터라고 말합니다. 저도 어머니와 마음이 맞아 사랑도 많이 받았을텐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그간 저희가 살아온 길도 우여곡절(迂餘曲折) 만만치 않은 세월이었습니다. 지금은 제주에 정착하여 늘 손자녀가 보고 싶지만, 이곳 생활에 적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머님 아들은 이곳에서 글을 써서 제주의 묻힌 인물을 발굴하고 잊혀진 역사를 재조명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답니다. 8년전 그이가 전립선암에 걸렸을 때, 죽기 전에 어머니의 글을 남기고자 <어머니 그리고 나의 이야기>책을 출간하기도 하였지요. 아직까지 크고 작은 불편함은 있지만 건강하게 지내고 있고 어머님에 대한 이 조금은 풀린 듯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식들을 훌륭히 키우신 어머님의 자식들은 모두 나름 성공하여 잘 지내고 있답니다.

당신의 아들이 지금 82, 제가 77, 어머니의 연세를 훌쩍 넘겨 살고 있답니다. 저는 지금도 남편을 존경하며 아끼고 의지하며 살고 있고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답니다.

남편은 훌륭한 작품을 쓰는 작가로서의 꿈을 꾸고 있답니다. 글을 써 좋은 작품을 통하여 제주 사회에 이바지하고 또 많이 인정받고 있답니다. 사는 날까지 의욕적으로 글을 쓰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건강이 따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젠 욕심 없이 건강 다스리며 천국에서 어머님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가기 전에 좀 더 많이 사랑하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다 고통 없이 떠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희 둘은 천국에서 어머니와 만나 몇 날 며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2024년 6월 13일(음5월8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61년의 기일이었다. 나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나는 제주에 살고,큰아들은 서울에, 작은 아들은 대구에서 산다. 그래도 10년전까지는 내가 부모님 기일과 명절에는 상경하여 큰아들집에서 제사를 지냈으나 그 후 우리 모두 바쁘기 때문에 기제사는 나 혼자 제주에서 지내왔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할 수가 없다. 내 무릎이 말을 안 듣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형식을 바꿨다. 어머니가 생전에 자식들의 배고픔을 덜기 위해 심으셨던 참외,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병석에서 설탕에 절인 토마토만 드셨던 그 토마토, 그리고 떡 등을 준비하여  식탁에 올리고 어머니 사진을 받쳐놓고 우리는 그 앞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자작시 '어머니'를 읊고 아내는 나도 모르게 작성한 시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우리는 아내의 기도로 끝마쳤다.